오랜만에.. 장문의 작문. (항문의 학문)
1.
반쯤이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을 반복하며 낄낄 거리고, 짱박혀 저격하는 긴장감을 잠깐 느껴주시다가 가끔 노래방에서 못볼 꼴 보는 정형화된 코스는 맨날 해도 재밌다. 아마 나머지 반쯤에 해당하는 현재와 미래가 자꾸 과거가 돼가니까 그래서인지도 모르지.
2.
또 15000원을 내고 집에 와서 -경기도민의 설움- 새벽 5시까지 삼국무쌍을 쪼샤주시다가 -다음달쯤 전무장 풀업 및 유니크 무기 획득 및 대장군 취임 예정- 2시쯤 일어나서 회사의 해외사업팀 팀장 결혼식에 갔다 왔다. 항상 그렇듯 삼국무쌍을 하다가 출발한 지라 30분쯤 늦게 도착한 결혼식장에는 500명은 족히 돼보이는 사람들로 미여터져나가 다른 층에서 티비 보며 식사를 해야 했다. 사람 진짜 많다 라며 이야기를 하는데 부사장님이 자기 결혼식 때는 1200명이 왔었단다.
3.
불편한 양복 차림으로 정상화된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나 결혼하면 250명 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부지가 부를 사람들, 어무니가 부를 사람들, 지현이가 부를 사람들, 그리고 내가 부를 사람들 (초중고도 많어) 다 합쳐서 250명 넘길 방법을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가 없더라.
4.
결혼식에 갔다가 집에 와서 삼국무쌍을 즐겨주시다가 자야님께서 항주 엠티를 마친 후 싸우나에서 피로회복 후 메신저에 왕림하신다 하여 플스를 끄고 티비 아래로 쑥 집어넣는데 티비가 지직 거리더니 꺼져버렸다. 이내 피어오르는 플라스틱 타는 냄새.
5.
평촌으로 이사 오면서 엄마 아빠가 하이마트 직원의 혀놀림에 속아 10년만에 바꾼 대우 티비. 왜 삼성엘지꺼 안샀냐며 나무랐는데 냉장고가 냉동을 못해 물이 질질 새나오고 티비는 지난 여름에 번개가 쳤을 땐 꺼져버렸었다. 대우 일렉트로닉스라는 회사가 아직 살아남을 수 있는건 GOD 때문이 아니라 정말 포지셔닝의 힘인게다.
6.
퇴근하시면 2-3시까지 디스커버리 채널과 동고동락하시는 아부지가 난리가 날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돌아오시자마자 지현이를 월마트로 데리고 티비를 사러 가셨다. 다나와 최저가보다 무려 10만원이 비싼 탓에 임시로 21인치 티비를 사와 나중에 내 방에 놓고 쓰라 하신다. 티비 사려고 인터넷을 뒤져보고, 티비 고장 나니 티비 사러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을 나서다니, 참 세상 변했다 라는 아부지.
7.
어쨌든 플스 전용 (실은 삼국무쌍 전용) 21인치 티비가 나에게 생긴다니 므흣한 기분으로 앉아있다가 COD2가 그리 재밌다는 퉁이 말이 생각나서 다운을 받았다. CD가 6장이다. 하드용량이 모자라 디비디 라이터로 쌓여있던 데이타를 디립따 구워냈다. 내일 해볼란다.
8.
문득 드는 생각. 양일간 2006년 현재 나에게 소속감을 부여해주는 두 집단을 왔다갔다 하였군. 임노동과 징병제라는 양대모순에서 몸부림치는 처량한 내 모습도 모습이지만, 요즘 들어 자꾸 사람들 사이에서 붕 뜬 느낌이 왜 드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9.
10년 넘은 티비와 냉장고를 썼던 그 과천시 원문동 주공 아파트 223동 501호에 살 땐, 내 주변엔 과천시 원문동 주공 아파트에 살거나 안양평촌수원 가끔 안산에 사는 녀석들 밖에 없었다. 대학에 와서 어디네 아들내미네 어디네 딸내미네 하는 문화적 충격을 느낄 찰라에 우리 티비에 번개가 친 것처럼 그 후가 기억이 나질 않아. 원래 잘 까먹지만.. 그리고 내 주변에 '유의하게' 남은 사람들은 연봉 240만원의 스물아홉이거나 그와 엇비슷한 공무원, 그와 덜비슷한 자칭 공무원, 가리봉까지 브로크백 마운틴 모양새로 옷사러 가는 찌질이, 10년에 2년 못미치게 녹두에 기거중인 대학원생, 셔틀버스와 전용 카페테리아 등 열악한 환경속에 고군분투하는 IT노동자, 비주류 언론인, 안산 공단 뱅커 혹은 직업적 미래에 별 관심 없는 선거철 일용직 등등.
10.
의도한 결과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가운데, 최근 2년을 1초 정도 생각해보았다. 내가 요즘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10% 이상은 여기서 비롯된건 아닌가 음모론이 제기되고 말았다. 스물셋 나이에 벤츠를 몰고 출근하고, 나와는 그닥 친하지 않은 압구정 바에서 조니워커 블루만을 선호한다거나, 잠실의 이름도 잘 기억 안나는 나만 모른다는 무슨 아파트에 살거나 혹은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아침에 같이 출근하거나 하는 풍경들이, 잘 몰랐는데 속에서 좀 낯설었던 모양이다. 빠른 70에게 이쁨 받으며 일할땐 풀무원 집회에서 흘러나오는 철의 노동자 소리에 흥얼거리던 사람들만 있어서 몰랐었나보다.
11.
이미 겪었어야 됐을 것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지각이라고 해야겠지. 나만 그랬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본받게 되고 한편으로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긴 하는데 속도가 꽤 더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색색의 펜과 가지런히 정리된 노트와 교과서가 있어야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이 고약한 고질적 문제 때문일까? 프리스타일은 절대 안 하는 초딩들도 다 아는건데 나만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12.
익숙한 것은 사랑할만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도 좋아해줘야겠다. 2달동안 美 중국 역사학계를 대표한다는 조너던스펜쓰와 (버스 안에서만)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 자식이 자꾸 모주석을 씹어대서 그렇긴 하지만 유복 + 유학파인 주은래의 여유와 넓은 마음을, 졷이든 떡이든 사람들은 높게 평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엔 과천이나 범계에서 만날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항문 파티가 끝난 쓸쓸한 자리에서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하는 심정을 이해해라. 좀. 그리고 아래는 보너스샷. 나도 V를 한다.